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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아름답다

by 길 위에 있다 2009. 11. 17.


난 아름다운 게 좋다. 감동적인 것도 좋다. 몇몇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아니 대부분은 그렇겠지만, 난 아름다운 것에 잘 감동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것에 이야기가 있으면 더욱 감동하고 만다. 이것 저것 깊이 없는 잡스러운 지식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도 사실 이런 뒷이야기(또는 뒷담화)를 탐하다 보니 생긴 결과이다. 

여느 초딩과는 다르게 대학가요제에 열광했던 애늙은이 초딩이었던 시절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피겨 경기에 반한 적이 있었다. 아주 단순하게, 언니들이 예뻐서. 애국심이 투철했던 시기였기도 해서, 우리나라에는 왜 저런 언니들이 없나, 안타깝기도 했다. 경기를 보면서, 엉덩이를 질질 끌어 조금씩 텔레비전에 다가가던 모습이,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김연아가, 짜안- 등장하고 난 후에는 잠깐씩 그 때 생각이 나서 드디어 나타났군, 생각했다. 정말 고생했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또 사람들이 들끓기 시작하는 게 짜증나서 김연아가 경기하다 넘어지기 라도 하면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이 넘어지는 실수가 가당키도 하냐.'라고 비꽜다. 
난, 꼬였으니까, 이 재수없는 발언은 패스.

암튼 김연아 덕에 어떤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본 그녀의 연기는 정말 아름다웠고, 난 감동받았다. 그 후에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난 더 감동받았다. 허허.
 


(아마도 미국 공연? 2008년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festa on ice를 올렸었지만, 계속 오류. 오류. 결국 급교체. 그 공연 정말 좋았건만.)

이 아가씨는 아라카와 시즈카. 1981년 생이니까 올 해 29살이겠다. 물론 아직 한창 나이지만, 안타깝게도 피겨계에서는 환갑이나 마찬가지란다. 
이 아가씨도 지금의 김연아 아사다 마오처럼 촉망받는 어린 선수였던 때가 있었나보다. 무슨 무슨 대회를 나가서 상을 타고, 일본에서는 피겨 신동과 같은 대접을 받았던 듯하다. 그리고 98년 나가노 올림픽에 엄청난 응원을 받으며 나갔지만 메달을 따지 못했나 보다. 이후, 이 아가씨는 누구 말마따나 '따'를 당했다. 어느 정도일까.
나가노 올림픽 이후 계속된 부진 속에서도 2004년에 월드 챔피언쉽에서 우승을 했지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니, 뭐 말 다했다. 이미 일본 피겨계는 아사다 마오와 안도 미키한테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아라카와 시즈카. 세 명이 출전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아사다 마오가 나이 제한에 걸려(어려서) 출전권을 박탈당하고 땜방으로 아라카와 시즈카가 투입된 것. 이 와중에 일본 총리까지 나서서 "아라카와 시즈카를 빼는 한이 있어도 아사다 마오를 출전시켜야 된다"며 ISU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일도 벌어졌단다.

아라카와 시즈카는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다. 그 메달이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 일본의 첫 메달이자, 첫 금메달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동계 올림픽에서 딴, 일본의 첫 여자 피겨 스케이팅 메달이었다. 물론 한가닥 하는 경쟁자들이 줄줄이 실수해서, '운 좋게 가져간' 메달이라는 소리도 솔찮이 듣는 듯 싶다. 하지만 메달이 달린 경기에만 나가면 몇 분 되지도 않는 프로그램 동안 네 다섯 번을 실수할 정도로 '운 없던' 아가씨가 실수 하나 없이 깨끗하게 프로그램을 끝낸 것은 그냥 운으로 될 일이 아니다. 누구 말마따나 피겨는 운도 실력이라고 하고, 경쟁자들이 팡팡 엉덩방아를 찧는 것도 아라카와 시즈카의 운이었겠지만, 침착하게 경기를 해 낸 것은 몇 년 간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였을 게다. 당연하게도.
  
이미 이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계획하고 있었던 이 아가씨는 계획대로 은퇴하고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더 편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연기를 하고 있다. 연륜이 묻어난다고들 한다.

투란도트 공연도 감동적이지만, you raise me up은 더욱 감동적이다. 맨날 똑같은 노래에 똑같은 구성이냐, 살짝 지루해지다가도 감동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 게다가 우연히 토리노 올림픽 직후인가, 나가노에서 열린 공연의 영상을 보았다. 그 영상에서 이 아가씨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공연한다. 8년 전에 처음 나갔던 나가노 올림픽에서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을테고, 이제 금메달을 갖고 돌아왔으니 어찌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겠는가.   


 ICE WARS : USA vs. The World 
(위 영상이랑 같은 공연인가. 옷이 다른데...)

난 이 아가씨의 이야기에 더 반했다가, 이제는 이 아가씨의 이 곡에 맞춘, 이 연기 자체가 너무 좋다. 
처음에는 허리가 뒤로 훅- 반이나 접혀지는(이너바우어..라고?) 이 아가씨의 장점에 입이 딱 벌어졌는데, 이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힘있게 활주하는 모습에 더 두근거린다.
노래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한 쪽 다리를 올리고 두 팔을 벌린 채 빠르게 활주하는 모습을 보면,
당장이라도 날아 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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