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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편지

by 길 위에 있다 2020. 6. 23.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猛熱)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 다오.

필승아,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 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20130430 / 23:30 / 비공개로 올렸던 글 / 


처음 저 편지를 보고, 엄청 슬펐던 기억이 나는데. 

드디어 살겠다는 마음을 먹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인데

저거 보내고 얼마 안 돼 세상을 떠서. 


저 편지를 보고 나서, 그 해인가, 전시되어 있는 낡은 저 편지를 볼 수 있다길래 김유정 문학관에도 갔었다. 

김유정 역에 있는 김유정 문학관. 


편지를 봤던가는 기억이 안 난다. 

닭을 패고 있던 점순이 동상을 본 건 확실하고, 문학관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셨던 것도 같고.


가끔 봄봄이나 동백꽃을 수업하다가 저 편지 얘기를 해 준다. 김유정이 젊은 나이에, 그렇게 많은 글을 쓰고 죽었다고. 

살려는 의지로 가득했는데, 그 절실함이 편지에서 보이는데 

죽었다고. 너무 슬프지 않냐고. 


애들은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 

그냥 치질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에 경악하거나 빵빵 웃음을 터뜨릴 뿐. 



뜬금없이 블로그 정리하려 들어왔다가

뜬금없이 쓸데없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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