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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환자

by 길 위에 있다 2010. 5. 28.

1.

요 며칠 간만에 다시 어깨가 아파서
그저께는 간만에 다시 파스도 붙였는데
어제는 좀 더 심해서

알람을 맞춰 놓고 일찍 잤다.
자고 나면 나아질거야. 그럼 일찍 일어나서 일 해야지. 

누워있는 상태에서 계속 아파서 쉽게 잠들지 못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본데,

아침, 새벽.

아, 아파!!! 

어깨는 계속 아팠다. 너무 아팠다. 이건 아니다. 조금 이라도 누워 있으면 덜 아프거나, 안 아프거나 해야 하는데
안 자고 버티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하루 종일 판서하고 수업 끝나 집에 돌아갈 때처럼 아팠다.
이건 아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이리 누워 봤다가 저리 누워 봤다가, 팔을 올려 봤다가 등 뒤로 돌려 봤다가
간신히 최대한 통증이 덜한 자세를 찾았다. 그리고 더 잤다.

아파서 제대로 못 잤으니까, 더 자도 되는 거야.  

그리고 일어나니 아홉 시가 넘었다. 이런 젠장.
하지만 어깨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일어나서 담배를 피면서 중얼중얼. "다행이야. 다행이야. 아휴.. 안 아프네.." 

2. 

학원에서 수업 하다가 또 교재를 안 갖고 온 아이들이 있어서, 분기탱천. 왜 자꾸 교재를 안 갖고 오는데! 
"저, 이번에 처음인데요..."
"니네 반, 지난 번에는 저 놈이 안 갖고 오고, 지지난 번에는 저 놈이 안 갖고 오고. 번갈아 가면서 안 갖고 오잖아. 한 번, 해 보자는 거냐~" 

오늘은 미리 얘기를 안 했으니까, 오늘 안 갖고 온 놈은 패스하고, 금요일부터 안 갖고 오는 놈들은 벌금 낼거야. 벌금 모아서, 시험 끝나면 피자 먹자!

이 반이 문제의 중2. 나랑 상극인 중2. 중2, 중2. 욕 먹는 중2, 인간이길 포기한 중2, 인간 중1과 인간 중3 사이의 과도기적인 존재인, 문제적 중2. 스스로 '우린 쓰레기이잖아요~.'라고 인정하는 중2. 아, 중2.

벌금이 안 모이면 어떻게 피자를 먹느냐, 그럼 샘이 다 갖는 거냐, 바보들, 벌금이 모자라도, 너희들이 잘 해서 벌금이 낼 일이 없어도, 피자는 그럼 내가 산다는 거잖아. 바보들아.
와, 그러더니, 막 벌금의 규칙들을 신나서 정한다. 하지만 교묘하게 지각에는 벌금을 안 물려고 한다. 엄청나게 지각하는 아이들이니까. 쉬는 시간에 떡볶기 사먹으러 나가서 10분 늦게 들어오는 건 기본인 녀석들이라, 지각에 벌금을 매기면, 시험 기간 동안 골백번도 피자를 사먹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음흉하게 내가 웃으면서, 지각에도 매겨야 하는 거 아닐까~라고 하니까, 아이들 분기탱천하며 그건 말이 안 되는 처사란다. 지각에 벌금을 매기면, 나한테도 벌금을 매길 조건을 걸겠단다. 어떤 녀석이 호기롭게 외쳤다.

"선생님, 아파보이면 벌금 만 원!" 

푸하하하!!!!!!!!!!!!!!!!!!! 전부 빵 터졌다.

판서하다가, 아쿠 어깨야, 똥이 안 나온다, 아쿠 배야, 뭐 이런 입버릇에, 아이들 말로는 볼살이 빠져서 광대뼈가 더 튀어 나와 쾡해보이고, 어쩔 수 없는 다크서클 때문에, 환자 같단다. "나, 안 아파!"라고 아무리 말해도, 다 필요없단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요 2학년 아이들은, 이게 안부 인사가 됐다.

"오늘은 밥 먹었어요?"
"오늘 첫 끼는, 그래서 몇 시에 먹었어요?"
"오늘도 아파보이잖아요!"
"오늘도 화장 한 거에요?"

결국, 우리는 딜을 했어야했겠지만, 나는 그딴 건 안 하는터라 아이들의 원성을 뒤로 하고 벌금을 걸었다.

지각하면 백 원.
아파보이는 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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