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설

하루

by 길 위에 있다 2010. 1. 18.



1. 할 일

백수 생활 한 달 동안 깨달은 건, 시간 단위, 분 단위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또는 않고, 하루를 보내게 된다는 거다.
시간, 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에는 아주 오랫동안 시달려 왔기 때문에 새롭지도 않고, 직장인이었을 때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무지 애를 썼기 때문에 내가 계획만 세우고 자주 어그러뜨린다는 것도 잘 안다.

anyway(흠... 이 말을 할 때는 적당한 동작이 필요한데...)
시간 단위로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망치더라도, 하기로 했던 것을 하면 좀 맘이 편해지니까 아주 자질구레한 것들도 계획에 넣고 하나씩 해 나간다. 방법은, 포스트잇에 써 놓은 '할 일'의 목록에서 끝낸 일은 색깔펜으로 지우는 것.



<오늘의 할 일>

이력서 업로드 및 학원 검색
 
평화바닥에 '오늘의 아랍어 한 마디'업로드
중동 지역 관련 기사 검색, 스크랩 → 검색 했지만 스크랩 할 만한 내용 없음
재활용 가게, 은행가기, 시계방 가기
3년 묵은 편집 하기
글 쓰기


2. 그리고 다짐

아... 오늘은 노력했다. 애썼다. 오늘은 밥도 먹었다. 내일은 운동도 해야지. 추우니까 집에서 해야지. 다짐, 또 다짐.



3. 계획에 없던 것

그래도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기는 법.
돌아오는 길에 맥주, 약간의 안주거리를 사서 예상에 없던 지출을 했고,
재활용 가게에는 안 입는 옷과 장신구 등등을 팔려고 갔던 건데 구경하다가 시디를 샀고.
<조국과 청춘>. '장산곶매'를 아주 좋아했고, 촌스런 시디 자켓이 반가워 샀는데 오랜만에 다시 들으니 중간의 간주나 끝나는 부분의 반주는 정말 깬다.


우리 동네, 정확히는 길 건너 성산동의 '되살림 가게'. 여기가 좋은 이유는, 여기에 물건을 팔면 반은 기증, 반은 '두루'로 계산해 준다. 그러니까 내가 판 물건이 2천원 정도로 책정이 되면 반은 기증한 셈 치고 나머지 1천원을 '두루'로 받게 되는 거다. 두루는 일종의 지역 화폐인데, 성산동 일대에 두루를 쓸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고 한다. 최고로 솔깃했던 거는 가격의 절반 정도를 두루로 내고 사 먹을 수 있는 감자탕집이 있다는 것! 작년만해도, 얼른 물건을 팔아서 장만한 두루로 감자탕을 사 먹겠다는 열의에 불탔는데, 지금은 일단 됐고!
딴 건 몰라도, 두루로 되살림가게에서 재활용품을 살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좋다. 오늘 판 물건의 가격이 얼마 정도일지는 내일 모레 정도 가봐야 안다. 아, 두근두근. 


4. 조국과 청춘, 장산곶매

학교 다닐 때, 과방은 늘 북적였다. 사람들로 북적였고, 술병으로 북적였고, 담배연기로 북적였다. 복작복작...
그리고 그 어딘가에서는 민중가요 책이 굴러다녔고, 누군가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기타 소리 못 들어주겠다고 누군가가 기타를 빼앗았고, 누군가는 빼앗겼고, 여전히 누군가의 기타 소리가 들렸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책을 봤고, 누군가는 술을 마셨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웠고, 누군가는 먹다 만 '갈아 만든 배'에 담뱃재를 떨었고, 누군가는 그 '갈아 만든 배'를 마셨다.
자주 바빴고, 꽤 재밌었고, 가끔 슬펐다.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으면, 그냥 냅뒀다. 그래, 뛰는구나!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 없어서 학점도 나쁘고, 남다른 기술도 없고, 이것저것 관심은 많지만 재능은 없고, 쉽게 잘 타오르지만 그렇다고 열정이라고 할 건 별로 없었던 나는 구체적으로, 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계획 따위는 아마 없었던 듯 한데, 그래서 이 꼬라지겠지만, 어떻게 '살아가야지'라는 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슴이 뛰었다.
그 때도, 김광석의 '나른한 오후'랑 딱 어울리게 반쯤 감긴 눈으로 멍을 때렸고, 술 자리에서도 쉽게 노곤해지는 의욕 상실의 성격파탄자였지만, 단단해지고 싶었다.   


 
                                                  예상에 없이 산 시디, 500원, <조국과 청춘>
                                                  한참 있으면 내레이션부터 나옴. 잘 안 들림. 

내 가슴에 사는 매가 이젠 오랜 잠을 깬다
잊었던 나의 매가 날개를 퍼덕인다
안락과 일상의 둥지를 부수고
눈빛은 천리를 꿰뚫고
이 세상을 누른다

밴드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민중가요를 부르는 청년들의 노래인데, 나름 엄청 히트를 쳤다. 
노래를 듣다 보면, 이 노래 속의 두두두두 북소리가 내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내 속이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난, 부지런해지기를 원하고, 매일매일 할 일을 정해 놓고 그대로 해야 잘 산 것 같고, 대학생 때처럼 잡다하게 관심 가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 어느 때보다 궁시렁도 많고 다종다양한 감정에 헤프며, '어떻게 살아갈까'에서 '어떻게'가 좀 달라졌다.  불만인 면은 좀 있지만, 크게 나쁘지는 않다. 

 

병수 아저씨의 아주 유명한 그림. 판화였나. 장산곶매. 나도 이 그림 정말 갖고 싶었다.

하지만 단단해지고자 하는 마음은,  다시 좀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잡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10.02.16
잠이 온다.  (4) 2010.02.08
2010 - 33  (4) 2010.01.02
몇 가지 익숙한 패턴  (1) 2009.12.01
고별 촬영  (1) 2009.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