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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의 마음

by 길 위에 있다 2009. 11. 5.


아이의 마음
                                                                                                    -란

(영화 <나무없는 산>에 대한 글입니다. 스포일러라고 할 건 없지만, 줄거리가 '조금' 포함되어 있어요.)

어렸을 때, 동생과 나는 잠깐씩 큰아버지 댁에서 지내곤 했다. 잠깐이었는지, 꽤 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나 어렸을 때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아, 그렇게 어리지는 않았던 듯 하다. 중학생 때 즈음? 아니면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아마도 이렇게 기억이 어렴풋한 것은, 딱히 어느 때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아닌가. 기억이..허허)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일거다. 큰아버지댁을 비롯하여 다른 곳에 여러 번, '보내졌다.'

그래, 그건 정말 싫은 일이었다. 그게 꼴랑 일 주일이라 하더라도, 내 기억에 '꼴랑 일 주일' 정도 였던 적은 없었던 듯 하지만, 기간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단 하루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 게 끔찍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머뭇대기도 했고, 아주 전투적으로 쳐들어가기도 했지만, 몇 번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는 '나는 아무렇지 않아요.'라는 식으로 무심하게 지냈다. 아마도 그때부터 친척들 사이에서는 '무심한 년', '독한 년'의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여갔는지도 모른다.
동생을 데리고, 짐을 짊어지고, 엄마와 함께 가든 아니든, 그닥 반가워하지 않는 표시가 역력한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어린 내 마음은 처음에는 지옥같다가 그렇게 나중에는 무뎌졌다. 아니, 무뎌질려고 애썼던 것 같다.

영화를 봤다. <나무 없는 산>.


다른 영화를 보다가 이 영화의 예고를 보고  '이 영화를 보겠다'라는 마음을 먹을 때만하더라도, 엄마에 의해 친척집에 맡겨진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는 이야기 정도로만 알았다. 이런 이야기 많다. <마음이>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울면 쪽팔리게도 따라 울기 때문에, 출근 전에 봐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한 정도다. '화장 번지면 웃기잖아. 고치기도 귀찮고.'

이 영화가 개봉하고 여기저기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 많이 비교 당한 영화가 <아무도 모른다>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면 <아무도 모른다>와 비슷하다. 아이들이 견디는 무게, 나름대로 그 상황을 이겨내려는 아이들의 노력을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답답함.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가 분명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끔찍해지는 그 상황들 때문에 영화적으로 느껴진다면, 상대적으로 이 영화는 조금 더 현실적이다. <인간극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큐처럼.

그런데 이미 영화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점부터 알았다. 이 영화, 다르구나. 적어도, 아이의 현실적인 마음을 짚어내는 것은. 상처받고, 삐지고, 그럼에도 조금이지만 자존심도 있고, 서글프고, 사람이 밉기도 한 아이의 마음이 보이는 것은. 그렇게 아이의 표정과 마음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되, 눈물 따위는 거두게한다. 적어도 나한테는.


엄마와 동생과 언니가 오순도순 밥 먹는 순간부터 언니는 엄마의 눈치를 본다. 아빠가 없고, 엄마는 힘들다. 아이는 안다. 엄마는 힘들어. 눈치를 본다. 내가 잘 해야하는데.
고모집으로 보내진 후, 난 아이이니까 단박에 눈치빠르게 행동할 수는 없다. 긴장해서 밤에 오줌도 싸고, 빵먹고 싶다는 동생을 대신해서 용기를 내서 고모한테 '빵 사주세요.'해야 한다. 나도 아직 어리기 때문에 정말 입 열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아이인데, 난 기댈대가 없다. 동생도 아이이지만, 동생은 언니가 있으니까 한결 안심이 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난 큰 아이한테 심하게 감정이입이 됐다. 

 이 영화를 소개하던 어느 글에서 "‘돌봄의 달인’으로 늘 호명되곤 하던 여성들은 이 영화에서 자신들의 고갈된 내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고 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돌봐야하는 책임이 지친 어머니에서 술을 달고 사는 고모로, 그리고 외할머니로 넘어가는 동안 스쳐지나 가며 조금씩 드러나는 이 여성들의 삶도 충분히 힘겹다. 집 나간 아빠, 담벼락에 붙어서 얼어있는 아이들에게도 들릴 정도로 "책임도 못질 아이를 왜 낳았느냐"고 매섭게 외쳐 대는 외할버지가 감싸지 못한 아이들의 삶을 책임지려고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도닥이기에는 그녀들의 삶도 피폐하다.    
그러니까 밥 하나 제대로 못 차려주는 고모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소한 관심이라는 것을, 고모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장사를 해서 하루먹고 사는 것도 빠듯한 고모는, 동생을 때린 남자애의 엄마한테 받은 약값 만원을 챙기면서, 이마가 까져서 피가 나는 동생은 챙길 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기댈 대 없는 아이들에게는 상처고 공포다.

그래서 결국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보내진 아이들이 그곳에서는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조금 외롭고 엄마가 보고 싶겠지만, 그래도 덜 힘들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성질을 내고 싫어한 외할아버지도 있지만, 마늘 까는 거 도와줘서 고맙다고 살갑게 말하는 외할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때며 함께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오순도순 얘기하는 아이들은, 할머니의 웃음과 다정함이 위로가 된다. 큰 아이가 겨울 신발을 사달라고 얘기하기까지 용기는 필요했겠지만, 눈치는 필요없다. 할머니의 구멍난 신발을 보고, 엄마를 기다리며 모아 놓은 돈을 내놓은 것은 더 이상 '눈치보기'가 아니다. 생존의 법칙이 조금 반영된, 할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애교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다정함에 대한 자신의 소소한 애정 표현이다.  
딱 그만큼의 애정과 다정함이 있으면 힘이 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다정함과 애정이 파릇파릇 돋아날테다. 엄마가 있으면 좋겠지만,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파삭파삭해진 마음을 도닥여 주는 눈빛과 말과 미소가, 나무 하나 없는 산에 풀이 나게 하는 물과 햇빛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 평화바닥, 200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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