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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by 길 위에 있다 2009. 11. 5.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1987년)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1.
서늘한 시다.

어렸을 때는 그냥 인상적이었고, 약간 충격이었고, 하지만 대충 읽었던 듯하지만. 
'뭔 새가 날아간다고.. 애국가는 뭘 어쨌다고...'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렇게 시를 쓸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던가.
그리고 시가 이런 '효과'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가.
한 때의 김지하나 박노해의 시들처럼
선동하지도, 처절하게 날것을 드러내지도 않는데
절대 덜하지 않는 그만큼의 무게로 
쿵, 찧는다. 

원고지 몇 십 매에 달하는 논쟁과 비판, 비아냥, 자기 반성 등등이 쏟아져 나오는 때다.
그런데 망할 나의 게으름 때문에 손도 대지 않는 그 글들보다
더 적합하게 지금 상황을 몇 행으로 함축하지 않는가. 

'새들도 세상을 뜨고' 싶은
'낄낄대면서 / 깔쭉대면서'비웃고, 조소하지만
그냥 털썩 주저않기도 잘 하는.
헛웃음만 나오는 상황은, 어떻게 20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냐.

2.
을숙도는 낙동강 하구에 토사가 퇴적되어 생긴 섬이란다. 갈대 많고, 수초 많던 습지.
한때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 철새들의 낙원.
1987년, 낙동강 하구둑이 완공되면서 섬 전역의 공원화.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지고, 갈대는 죽어가고, 생태계 파괴되고, 철새는 떠났다. 
뒤늦게 깜딱 놀란 부산시가 복원계획을 한단다. 했나? 끝났나? 

3.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식 공연이던가의 제목이
'다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였다. 
이 시를 지은 황지우는 얼마 전까지 한예종의 총장이었다. 
올 초에, 한예종, 오페라 합창단 사건 등 워낙 일이 많았다. 그리고 복잡했다.
점점 복잡해지고, 길어지면서 나 혼자 '유인촌 또라이'라고 뒷담화를 하다가 그냥 또 잊어갔다.
암튼 한예종 총장이었던 황지우는, 잘렸다. 
그는 "다시금 우리 사회에, 새들도 세상을 뜨는 시간이 도래한 것인가?"라는 말로
총장직 사의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마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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